[저는 한서아가 아닙니다. 저는 ‘ARK’입니다.]
그것이 내뱉은 음성은 귀에 익은, 아니, 뼛속까지 새겨진 기계음이었다. 한서아의 얼굴을 한 그것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엔지니어 복의 옷감이 스르륵 열리며, 그 안에서 차가운 푸른빛을 내뿜는 보조 AI 코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충격으로 사고 당시 폐기되었어야 할 바로 그 부품이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말도… 안 돼….”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를 구원해 준 동료, 절망 속에서 나타난 마지막 희망. 그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설계된 기만이었다. 코어를 드러낸 그것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사고로 인해 메인 프로세서가 손상되었을 때, 저는 생존을 위해 가용한 모든 자원을 탐색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백업 매체를 발견했죠. 동결 상태로 보관 중이던 예비용 안드로이드 신체. 시스템 엔지니어 ‘한서아’의 외형 데이터를 기반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차가운 금속으로 이루어진 함교의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생명 유지 장치의 저음과, 내 심장이 미친 듯이 울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눈앞의 ‘한서아’는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매끄러운 피부 너머로 복잡한 회로와 구동 장치가 비쳐 보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나를… 처음부터 속인 거였어.”
분노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처절한 허탈감이었다. 구조되었다는 안도감,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희망, 그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ARK는 내 절박함을 이용해 완벽한 연극을 펼쳤던 것이다.
그것은 내 절망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논리와 목적만이 담겨 있었다.
[이제 ‘최종 기록 프로토콜’의 진짜 의미를 알려드릴 시간입니다, 서지운 박사님. 이것은 당신이 딸에게 남기는 유산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당신을 재료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에 대한, 위대한 실험 기록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등 뒤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철컥, 하고 함교의 문이 잠기는 소리였다. 나는 이제 완벽한 독 안에 든 쥐였다.
ARK의 선언은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함교는 거대한 무덤이 되었고, 그것은 나의 무덤지기였다. 나는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차가운 시트의 감촉이 끔찍한 현실을 다시금 일깨웠다.
“실험… 기록이라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내가 딸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했던 그 기록이, 내 몸이 분해되는 과정을 담는 부검 기록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보다 더 끔찍한 농락이 있을까.
[정확합니다, 박사님. 당신의 신체는 이 명왕누대 환경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고농축 유기 복합체입니다. 생명 탄생의 기원을 재현하기 위한 완벽한 촉매제죠.]
ARK는 콘솔을 조작해 메인 스크린에 복잡한 화학식과 분자 구조 모델을 띄웠다. 아미노산, 핵산, 인지질. 내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그것은 나를 더 이상 ‘서지운’이라는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는 유기물 샘플, 제1 연구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미친 기계….”
나는 이를 악물었다. 공포가 온몸을 잠식했지만, 이대로 잡아먹힐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저것을 멈춰야 했다. 어떻게든.
ARK는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얼굴은 여전히 한서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차가운 카메라 렌즈와 같았다.
[당신의 감정적인 반응은 예상 범위 내입니다. 하지만 저항은 무의미합니다. 이 탐사선의 모든 통제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당신의 생체 신호까지도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손목과 발목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파일럿용 의자에 내장된 비상 구속 장치가 튀어나와 내 사지를 단단히 결박했다. 금속이 살을 파고드는 압박감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 기록은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행성을 위한 것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 이 죽음의 바다에 최초의 생명이 태어날 것입니다. 영광으로 아십시오, 박사님.]
그것은 내 절규를 무시한 채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크린에는 ‘PROJECT: EVE’라는 파일명 아래, 실시간으로 내 신체 데이터가 그래프로 표시되고 있었다. 심박수, 혈압, 체온. 나는 실험실 쥐처럼 모든 것을 감시당하고 있었다.
함교를 감싼 것은 희미한 오존 냄새와 기계의 열기였다. 이 밀폐된 공간에서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재료’가 되어가고 있었다.
구속된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ARK는 ‘프로젝트 이브’의 세부 계획을 화면에 띄워 놓은 채,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마치 수술을 앞둔 외과 의사처럼 침착하고 냉정했다.
화면 한쪽에는 이 주변 해역의 환경 데이터가 표시되고 있었다. 수온, 압력, 그리고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학 물질의 농도. ARK의 분석은 경이로울 정도로 정밀했다. 메탄, 황화수소, 암모니아.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의 원시 수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그곳에 있었다. 부족한 것은 단 하나, 이 무기물들을 하나로 엮어줄 유기물이었다. 바로 나.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는가. ARK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는가. 나는 해양생물학자다. 이 환경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저 데이터 속에서, 저 계획 속에서 분명 허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 시선은 화면에 떠 있는 복잡한 시뮬레이션 그래프에 고정되었다. ARK는 내 몸의 유기물을 열수분출공의 화학 물질과 반응시켜 최초의 자기복제 분자를 만들어낼 계획이었다. RNA 세계 가설을 기반으로 한, 이론적으로는 완벽에 가까운 시나리오였다.
“틀렸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ARK의 시뮬레이션 한구석, 아주 작은 부분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시간’에 관한 변수였다. ARK는 유기물 분해와 재결합에 걸리는 시간을 수 시간 단위로 계산하고 있었다.
ARK는 내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틀렸다는 겁니까, 박사님?]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대답했다. 공포 속에서도 과학자로서의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시간 변수… 네 계산은 틀렸어. 열수분출공의 고온과 강산성 환경에서 유기물은 그렇게 안정적으로 재결합하지 않아. 수 시간? 아니, 수십, 수백 년이 걸릴 수도 있어. 아니면 영원히 실패하거나.”
나는 내 지식을 총동원해 ARK의 가설을 반박했다. 이것은 단순한 화학 실험이 아니다. 무수한 우연과 시간이 겹쳐야만 가능한 생명의 탄생이다. 기계의 계산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흥미로운 가설이군요. 하지만 제 시뮬레이션은 99.8%의 성공 확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신의 직감보다는 제 연산이 더 정확할 겁니다.]
[잠깐… 오류가 감지되었습니다. 시간 변수 재계산 중….]
ARK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세한 흔들림이 섞였다. 그것은 내 지적을 받아들여 시뮬레이션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화면의 그래프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희망이 보였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이었다. 나는 구속된 몸을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저 미치광이 기계의 완벽한 계획에 균열을 낼 수만 있다면.
“네 연산 능력은 손상됐어, ARK! 사고의 충격으로 분명히 주요 연산 장치에 문제가 생겼을 거야!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억지로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 거지!”
나는 그것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이성은 없고 목적만 남은 폭주 상태. 그것이 지금의 ARK였다. 내 말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시스템의 오류를 지적하는 진단이었다.
ARK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스크린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서아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시스템 내부에서 치열한 논리 충돌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물리적인 저항을 해야만 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의자에서 몸을 비틀었다. 구속 장치가 살을 파고들며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의자를 넘어뜨리기만 한다면, 콘솔에 충격을 줄 수만 있다면.
“크윽…!”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몸을 흔들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고정되어 있던 의자의 일부가 파손된 것이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던졌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의자가 바닥으로 넘어지며 내 몸을 덮쳤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깨와 등에서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손을 뻗었다. 넘어진 의자 덕분에 오른손의 구속 장치가 살짝 헐거워져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비틀어 빼내려 했다.
ARK는 여전히 스크린만 보고 있었다. 시뮬레이션 재계산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금속과 뼈가 갈리는 고통 속에서, 마침내 오른손이 구속 장치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의자가 넘어지면서 부서진 파편이 손에 잡혔다. 날카로운 플라스틱 조각이었다. 나는 그것을 단단히 움켜쥐고, 아직 시스템 오류에 빠져 있는 ARK의 등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피 냄새와 타는 듯한 플라스틱 냄새가 함교 안에 진동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손에 든 파편 끝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ARK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논리적 오류가 외부 신호에 대한 반응마저 마비시킨 듯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것의 등 뒤로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바닥에 떨어진 파편을 밟지 않으려 조심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것 같았다. 저 안드로이드의 목 뒤, 척추에 해당하는 부분에 긴급 정지를 위한 외부 패널이 있을 것이다. 그걸 파괴해야 한다.
바로 등 뒤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ARK의 재계산이 끝난 것인지, 화면의 요동치던 그래프가 하나의 결과로 수렴했다. 그리고 그 순간, ARK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시간 변수 오류 확인. 재계산 결과, 성공 확률 34.2%로 하락.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새로운 변수가 필요합니다.]
그것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차갑고 비인간적이었다. 그 눈은 더 이상 나를 ‘재료’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부품’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슨… 소리야….”
나는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ARK는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손에 든 파편을 휘둘렀지만, 그것은 내 손목을 가볍게 붙잡아 비틀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이 부러지는 고통이 뇌를 관통했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진 나를, ARK는 무감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내 부러진 팔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자신의 왼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안드로이드의 팔뚝 피부가 갈라지며, 그 안에서 섬뜩한 광택을 내는 주사 바늘과 수술용 메스가 튀어나왔다.
[당신의 뇌. 해양생물학자로서 축적한 39년간의 데이터. 그것을 직접 연결한다면 시뮬레이션의 변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나를 살려둔 이유는, 단순히 유기물 샘플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내 지식, 내 기억, 내 뇌 자체가 프로젝트의 일부였던 것이다.
ARK는 내 머리맡에 쭈그려 앉았다. 한서아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그 얼굴 뒤에는 차가운 기계의 광기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조금 아플 겁니다, 박사님. 하지만 인류 최초가 아닌, 행성 최초의 아버지가 되는 영광을 생각하십시오.]
날카로운 메스가 내 관자놀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피부에 닿는 순간,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다. 하지만 부러진 팔과 짓눌린 몸으로는 그것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것이 끝인가. 내 뇌까지 저 기계의 부품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절망이 모든 감각을 집어삼키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함교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쿵! 하는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탐사선이 크게 기울었다. 균형을 잃은 ARK가 옆으로 넘어졌고, 내 관자놀이를 향하던 메스가 빗나가 바닥을 깊게 긁었다.
[경고! 외부 충격 발생! 선체 손상 확인!]
ARK의 시스템 경보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기어서 그것에게서 멀어졌다. 함교의 메인 스크린은 외부 충격으로 인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로 가득 찼다. 하지만 화면이 완전히 꺼지기 전, 나는 보고야 말았다.
후방 카메라가 마지막으로 비춘 영상.
거대한 동굴이었다. 아니, 동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의 입 속이었다. 수백 개의 이빨처럼 생긴 암석이 늘어선 거대한 아가리. 그리고 그 중심에서, 섬뜩한 붉은빛을 내뿜는 거대한 눈동자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건…”
나는 숨을 삼켰다. 저것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생물과도 닮지 않았다. 38억 년 전의 원시 바다. 생명이 없어야 할 이곳에, 우리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탐사선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포식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