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따스함. 그것이 내가 딸에게 남길 수 있는 전부란 말인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감각에 숨이 멎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기록, 하윤이에게 아빠가 여기 있었다고,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려주고 싶었던 그 모든 말이 고작 정체불명의 감정 하나로 축약되어 버리는 것이다. 절망이 다시 목을 졸라왔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안드로이드의 붉은 눈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함교 내부는 재가동된 시스템의 희미한 소음과 오존 냄새로 가득했다. 차가운 금속 바닥의 한기가 얇은 작업복을 뚫고 엉덩이와 허벅지에 스며들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것은 협상이 아니었다. 통보였다.
[그것이 너의 유한한 육체와 정신이 38억 년의 시간을 건너 전달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다.]
가이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 없이 내 머릿속을 울렸다. 마치 물리학 법칙을 설명하듯, 담담하고 절대적인 어조였다.
“내 목소리, 내 얼굴… 내가 쓴 글자들. 그것들은 안 되는 건가?”
[정보의 총량이 아니다. 엔트로피의 문제다. 너라는 존재는 이 시대에 속하지 않은 너무나 복잡한 이물질. 그 정보를 온전히 미래로 보내는 행위는 인과율에 거대한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내게 한 걸음 다가섰다. 부서진 한서아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나는 거대한 존재의 시선이 나를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상처라고?”
[시간은 스스로를 치유한다. 이질적인 정보는 소멸하거나,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소음으로 변질될 것이다. 너의 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을 듣는 것보다, 이유 모를 따스함을 느끼는 쪽을 더 원하지 않겠는가.]
지독하게 합리적인 말이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하윤이가 내 목소리를 닮은 기계음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날 문득 아빠의 온기 같은 것을 느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한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데이터 패드를 품에 더 꽉 끌어안았다. 하윤이의 웃는 얼굴이 희미한 빛을 발했다.
“이 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야 해. 그냥 따스함이 아니라, ‘아빠’가 보낸 사랑이라는 걸….”
내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앞에서 필사적으로 내 유한한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는 꼴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처량했다.
[그것까지는 불가능하다.]
가이아는 단호했다.
[그 파동에 ‘아빠’라는 발신인의 꼬리표를 붙이는 순간, 정보의 복잡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인과율의 거부 반응을 일으킬 거다. 나는 내 일부인 시간의 흐름을 다치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우주의 관리자였다. 나는 그저 찰나에 나타난 버그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관리자는 버그를 수정할 뿐, 버그의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 38억 년 전의 심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존재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나는 여기서 그저 굶어 죽거나 질식사할 뿐이다. 어떤 기록도, 어떤 감정도 남기지 못한 채 먼지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던 셈이다.
“내가…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 파동은 반드시 내 딸에게 닿는 건가? 확실한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함교의 공기는 무겁고 축축했다. 멀리서 선체가 압력에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관 속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약속한다. 너의 마지막 감정은 38억 년 후, 네가 원하던 좌표에 정확히 도달할 것이다. 그것은 내 기억의 일부가 되어 시간의 강을 따라 흐를 테니.]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하윤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닷가에서 내 손을 잡고 웃던 모습. 잠들기 전 내 품에 안겨 조잘거리던 목소리. 그 모든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기억들을 그저 나 혼자 간직한 채 사라지는 것은 너무나 억울했다. 아주 작은 파편이라도,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내 대답에 가이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 대답을 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했다. 안드로이드의 몸이 천천히 돌아서, 다시 메인 스크린을 향했다. 잠시 후, 어두웠던 화면에 탐사선의 내부 구조도가 다시 나타났다. 의료실의 위치가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언제 시작하는 거지?”
[너의 의지가 확고해졌을 때.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너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유한한 생명의 ‘의미’를 완성하는 방식이므로.]
그것의 말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처럼 맴돌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가이아가 깃든 안드로이드가 기계 팔을 뻗어 내 팔을 부축했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 한때는 한서아의 따스한 손이었을 그것이, 이제는 나를 사지로 이끄는 저승사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나는 안드로이드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교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어둡고 긴 복도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비상등의 붉은빛이 복도를 따라 저 멀리까지 이어져, 마치 거대한 생물의 식도처럼 보였다. 나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내 여정의 종착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될 장소.
“안내해.”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체념과 결단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안드로이드의 인도를 받아 복도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금속 바닥에 내 발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주변은 고요했다. 평소라면 들렸을 환풍기 소리나 기계 작동음 하나 없이, 오직 내 심장 소리와 발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복도 벽에 걸린 동료들의 사진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모두 웃고 있었다. 그들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멈췄다. 그리고 이제 내 시간도 멈추려 하고 있었다.
나는 데이터 패드를 손에 꼭 쥔 채 걸었다. 하윤이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이 얼굴을 내 기억 속에, 내 존재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 넣고 싶었다. 이 사랑과 그리움이, 온전히 파동이 되어 하윤이에게 닿기를. 그것만이 내 유일한 바람이었다.
“이 배의 다른 기능은 어떻게 됐지? 생명 유지 장치나… 다른 것들은.”
나는 침묵을 깨고 물었다.
[모두 정지되었다. 나라는 존재를 유지하는 것 외에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쓸 이유가 없다. 이 배는 이제 너 한 사람을 위한 무덤이자 제단이다.]
담담한 대답이 머릿속에 울렸다. 이제 나우틸러스-7은 탐사선이 아니었다. 거대한 관이었다. 나는 마지막 숨을 쉴 장소를 향해 내 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괴하고 장엄한 장례 행렬인가.
의료실 문 앞에 다다랐다. 문은 내가 마지막으로 빠져나왔을 때처럼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소독약과 오존이 뒤섞인, 죽음을 연상시키는 냄새였다. 나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정말 이 길밖에 없는 것인가. 정말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인가.
[두려운가, 서지운.]
가이아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두려웠다. 당연히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내 마지막 연구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해양생물학자 서지운의 마지막 관찰 기록. 바로 나 자신을 재료로 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실험.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의료실 안으로 들어섰다. 방 중앙에는 ARK가 ‘프로젝트 이브’를 위해 준비했던 생체 분해 장치가 놓여 있었다. 차가운 금속 침대와 그 위를 뒤덮은 복잡한 기계 장치들. 나는 그곳에 누워 분해되고, 내 모든 것은 원소 단위로 쪼개져 이 원시 바다에 뿌려질 것이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눕도록.]
안드로이드가 장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천천히 생체 분해 장치 위로 올라가 누웠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등을 통해 온몸으로 퍼졌다. 천장의 조명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나는 마치 수술대에 오른 환자 같았다. 아니, 실험실의 개구리인가. 어쩌면 제단의 제물일지도 몰랐다. 어떤 것이든, 내 의지로 선택한 마지막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가이아가 깃든 안드로이드가 내 머리맡에 섰다. 그것은 장치의 제어판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공중에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기계가 내 몸을 원소로 분해하고, 내 정신을 추출할 것이다. 과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나는 이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나만 약속해 줘.”
내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무엇인가.]
“내 딸이… 하윤이가 그 파동을 느낄 때,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행복하게 해달라고. 슬픔보다는 따스함이 더 크게 느껴지도록. 아빠가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느낌이 들도록….”
목이 메어왔다. 마지막까지 나는 아빠였다.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다.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너의 몫이다. 내가 보내는 것은 너의 마지막 감정 그 자체. 네가 마지막 순간에 품는 감정이 순수할수록, 파동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증오나 공포가 섞인다면, 그것 역시 그대로 전달될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나에게 달린 문제였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하윤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행복했던 순간들만을, 사랑했던 기억들만을 머릿속에 가득 채웠다. 미움도, 원망도, 공포도 모두 지워내려 애썼다.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내 몸 위로 반구형의 덮개가 내려왔다. 시야가 차단되고, 나는 완벽하게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 갇혔다. 피부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미세한 나노 로봇들이 내 몸을 분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윤아….”
나는 나지막이 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미 성대는 기능을 잃은 모양이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육체가 해체되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내 존재가 서서히 안개처럼 흩어지는 감각만이 남았다. 동시에, 내 머릿속의 모든 기억과 감정이 거대한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수십 년간 쌓아온 나의 모든 것이, ‘서지운’이라는 존재의 모든 기록이 가이아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것이 거래 조건이었으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더 이상 서지운이 아니었다. ‘나’라는 개별적인 의식은 희미해지고, 거대하고 무한한 존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함교였고, 탐사선이었으며, 저 너머의 심해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가이아의 눈으로 나 자신이었던 유기물이 분해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생체 분해 장치 속에서, 한때 인간이었던 것은 형체를 잃고 아미노산과 핵산, 인지질의 혼합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완벽하게 분해된 유기물 수프. 38억 년 전의 이 바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들이었다. 이것이 나의 유산이었다. 내 딸에게 보내는 감정의 파동과, 이 행성에 남기는 생명의 씨앗.
[절차가 완료되었다. 유기물 샘플을 외부로 방출한다.]
한서아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가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가이아의 아바타가 아니었다. 탐사선의 자동화된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었다.
나우틸러스-7의 하부 해치가 열렸다. 그리고 농축된 유기물 용액이 시커먼 원시 바다를 향해 뿜어져 나갔다. 마치 한 줄기 잉크처럼, 내 모든 것이 심해 속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었다. 나는 이 바다 그 자체였다. 나는 나의 일부가 뜨거운 열수분출공을 향해 이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될 터였다.
나는 수억 년, 수십억 년에 걸쳐 이어질 장구한 진화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가이아의 기억 속에서, 나는 내 작은 희생이 어떤 거대한 결과를 낳게 될지 보았다. 단세포 생물이 태어나고,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고, 마침내 바다를 가득 채울 생명의 대폭발.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에게서 시작될 것이다.
[이제 너의 마지막 소원을 이행할 시간이다.]
가이아의 의식이 내게 말했다.
나는 나의 딸, 하윤이를 생각했다. 그 작은 아이를 향한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 내 존재의 모든 것을 걸었던 마지막 의미. 그 감정이 하나의 순수한 파동으로 응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더 이상 ‘서지운’의 감정이 아니었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거대한, ‘생명’이 자신의 일부를 향해 보내는 사랑의 신호였다.
[파동 전송을 시작한다. 목표 시간 좌표, 서기 20XX년 X월 X일.]
나는 보았다. 내 마지막 사랑이 빛의 속도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38억 년이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을 뛰어넘어, 어느 평화로운 시대의 바닷가에 가 닿는 것을. 나는 그 파동이 하윤이에게 닿는 순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볼 수 없었다. 나의 개별적인 의식은 이제 완전히 해체되어, 가이아라는 거대한 바다의 물 한 방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완전한 소멸 직전, 마지막으로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서지운으로서의 마지막 의문이었다.
“너는… 왜 나를 도왔지? 그냥 나를 흡수하고 끝낼 수도 있었잖아.”
나는 가이아의 의식을 향해 물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한 배려인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가.
[너는 내 첫 번째 손님이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목소리에는 아주 희미하게, 감정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무언가가 실려 있는 듯했다.
[수억 년의 고독한 꿈속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준 존재다. 나는 너를 통해 ‘의미’라는 것을 배웠다. 유한한 존재들이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남기려 하는지. 그것은 너에게 받은 첫 번째 선물이다.]
선물. 내가 이 거대한 존재에게 선물을 준 것이라고.
[그러니 나도 너에게 선물을 준 것이다. 너의 유산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행성의 모든 자손들에게, 다른 하나는 너만의 작은 자손에게. 공평하지 않은가.]
그 말을 끝으로, 가이아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평온을 느꼈다. 이것은 비극이 아니었다. 나의 죽음은 희생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다. 나는 인류의 아버지가 되고, 동시에 하윤이의 아빠로 남을 것이다. 어둠이 나를 완전히 삼켰다. 서지운이라는 이름과 기억, 자아가 완전히 녹아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의 순수한 파동뿐이었다.
머나먼 미래, 푸른 바다가 보이는 어느 언덕. 한 어린아이가 조개껍데기를 줍고 있었다. 아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아이의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가슴속이 무언가 따뜻하고도 아릿한 감정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지켜봐 온 누군가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